[강드림의 싫존주의] 씨발·존나가 왜 우리말이 아닌가

입력시간 : 2019-10-09 21:30:43 , 최종수정 : 2019-10-10 10:42:20, 편집부 기자

 

씨발과 존나는 현재 표준어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발과 존나는 현재 한국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강조형 표현중의 하나다. 만약 내일 갑자기 씨발과 존나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한다면 이 나라의 소통문화는 엄청난 대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뭔가 좀 이상스럽지 않은가.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입에 올리는 단어를 왜 우린 표준어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는 필연적으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문화를 담게 되어 있다. 우리가 도처에 넘쳐나는 존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국민들이 ‘존나’ 열심히 살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제개발을 위해서 우리는 늘 끝없이 존나게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충’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었다. 나쁜짓을 할때도 존나 치밀하게 해야 했고, 술을 마실때도 존나게 마셔야 했다. 존나는 근대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다. 근데 이 중요한 단어가 표준어가 아니다.


씨발은 어떨까. 한국인의 다양한 분노의 표현은 씨발로 정리되기 쉽다.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할 때, 깜빡이 없이 끼여드는 차를 만날 때, 못된 정치인의 뉴스를 봤을 때 우리는 씨발로 하나가 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화’가 넘쳐난다. 이 나라에서는 이해와 관용이라는 단어를 21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실정이다.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대의는 없었던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에 불의, 불법 같은 단어를 너무도 쉽게 생략되었던 사회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악습과 관행들을 보고 어쩌지 못함을 탄식하며 사람들을 조용히 되뇌였을 것이다. 에이 씨발. 씨발 역시 근대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어이지만 역시 표준어가 아니다. 이쯤 되면 표준어를 제정하는 곳에 따져 물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민족의 이처럼 중요한 단어를 어찌 표준어로 정하지 못하는 것이냐고.


표준어는 ‘교양 있는 서울사람들의 언어’로 정의된다. 씨발과 존나는 교양 있는 서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언어인 셈이다. 한강의 기적을 칭송하지만 그 과정에서 억압당한 민주주의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혹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때문에 강제로 쫒겨난 철거민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씨발과 존나를 늘 입에 담고 살아야 했던 지난 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온 시대를 부정하고자 한다. 허나 먹고 살만해졌다는 현재에도 여전히 씨발과 존나는 넘쳐난다. 여전히 우린 강요된 열심히즘과 화를 참아내며 살아야 한다.


국립국어원은 과거 짜장면을 잘못된 표현이라 지적하며 ‘자장면’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가르쳐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나운서를 제외하고 아무도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짜장면을 표준어로 인정하며 백기를 들었다. 그들의 표준어관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표준어는 그 나라의 일반적인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보통말’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자랑하고 싶어서 정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이란 말이다. 우린 ‘씨발과 존나와 상관없는 우아하고 품격높인 언어생활을 하는 그런 국민이다’ 따위의 오만을 그만 집어치우고 이제라도 씨발과 존나를 표준어로 제정토록 촉구한다. 그리되면 어떻게 그런 비속어가 표준어가 되느냐고 도처에서 씨발이 난무할 것이다. 그것보라! 씨발과 존나는 이처럼 우리와 친숙한 언어인 셈이다. 약한 사람은 자신의 약한모습을 어떻게든 감추려 들지만 강한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위선 그만 떨고 자유로이 씨발과 존나를 외치자.




[강드림]

다르게살기운동본부 본부장

대한돌싱권익위원회 위원장

비운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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